베트남 일간,주간 뉴스 브리핑

🇻🇳 베트남 전쟁 1편: 전쟁의 서막, 왜 베트남은 두 나라가 되었나?

비즈트래블러 2025. 6. 27. 17:52
반응형


1950년대,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동남아시아의 작은 나라 베트남에서도 또 하나의 ‘분단’이 시작되고 있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알고 있는 베트남 전쟁은 사실 단순한 전쟁이 아니라, 식민지 해방과 냉전, 이념 충돌, 국제정치가 얽힌 ‘복합 전쟁’이었습니다.


프랑스 식민지 시절 베트남 지도


📌 1. 프랑스 식민지였던 베트남

19세기 후반, 프랑스는 베트남을 포함한 인도차이나 3국(라오스, 캄보디아)을 식민 지배하에 두었습니다. 베트남 사람들은 프랑스의 억압과 착취에 맞서 수십 년간 독립운동을 이어갔고, 그 중심에 있던 인물이 바로 호치민입니다.
그는 공산주의를 받아들여 민족해방을 외쳤고, 1945년 일본이 패망한 직후 하노이에서 **베트남민주공화국(북베트남)**의 수립을 선포했습니다.

하지만 프랑스는 쉽게 물러나지 않았습니다.
프랑스는 다시 남부 사이공에 친서방 정권을 세우고, 북부의 호치민 세력과 충돌하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의 시작입니다.

디엔비엔푸 전투


📌 2. 디엔비엔푸 전투 – 식민 지배의 종말

1954년, 세계사의 전환점이 될 전투가 벌어집니다.
베트민(호치민의 공산군)은 북부 산악지대 디엔비엔푸에서 프랑스군을 포위하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습니다.
그리고 결국 프랑스군이 항복하면서, 100년 가까이 이어졌던 프랑스 식민지 시대는 막을 내리게 됩니다.

이 전투는 세계에 충격을 줬습니다.
“한 줌도 안 되는 아시아의 농민 군대가 유럽의 제국주의를 무너뜨렸다”는 상징으로 남았기 때문입니다.


제네바 협약 체결식의 모습 (사진: 베트남 통신사)


📌 3. 제네바 협정과 ‘베트남 분단’

디엔비엔푸 전투 이후, 국제 사회는 스위스 제네바에서 회담을 엽니다.
여기서 결정된 것이 바로 북위 17도를 기준으로 베트남을 임시 분단하는 것이었습니다.

북쪽은 호치민이 이끄는 공산주의 정부(하노이)

남쪽은 미국이 지원하는 반공 정부(사이공)


이 구조, 익숙하지 않으신가요?
바로 한반도의 38선 분단과 비슷한 상황입니다.

다만, 제네바 협정에는 2년 내 총선거를 통해 통일정부를 구성한다는 조항이 있었지만, 남베트남은 이를 거부했고, 통일은 물 건너가게 됩니다.



📌 4. 미국의 개입 시작

남베트남의 초대 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은 독재적 통치를 강화하고, 불교 탄압 등으로 민심을 잃어갑니다. 이에 따라 **베트콩(Viet Cong)**이라는 반정부 무장세력이 남부에서 활동을 시작했고, 북베트남의 지원도 받게 됩니다.
이때부터 미국은 공산주의 확산을 막는다는 명분으로 본격적으로 개입하게 됩니다.

“도미노 이론”을 들어보셨나요?
당시 미국은 한 나라가 공산화되면 주변 국가들도 도미노처럼 무너질 것이라 우려했죠.
그래서 남베트남을 지키는 것이 곧 세계 자유주의의 방어선이라는 논리로 파병을 준비합니다.

✅ 마무리: 단순한 내전이 아니었던 베트남 전쟁

베트남 전쟁은 단순한 북과 남의 내전이 아니라,

프랑스 제국주의의 몰락,

냉전 속 강대국들의 개입,

민족 자결 vs 이념 충돌이라는 세 가지 축이 맞물린 국제전이었습니다.


📌 다음 편 예고

2편에서는, 분단 이후 각각의 길을 걷게 된 남베트남과 북베트남의 체제와 이념 충돌을 다룹니다.

호치민의 공산 베트남

응오딘지엠의 반공 남베트남
그리고, 베트남도 한반도처럼 **'남과 북, 두 체제의 대립'**으로 치닫게 된 과정을 알아봅니다.


한국과 베트남, 두 분단국의 운명은 어떻게 닮아 있었을까요?
다음 편에서 이어집니다.

반응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