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베트남 전쟁 6편: 한국군의 파병, 경제인가 의무인가
1964년부터 1973년까지, 베트남에는 한국군이 있었습니다.
맹호부대, 백마부대, 청룡부대, 이름만 들어도 익숙한 이 부대들은
대한민국 역사상 가장 큰 규모로 해외에 파병된 전투병력이었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왜, 멀고도 낯선 베트남 땅에 군대를 보냈을까요?

📌 1. 한국군 참전의 배경 – 박정희의 선택
1960년대 초, 한국은 전쟁 후 폐허에서 막 벗어나려는 시기였습니다.
경제도 군사도 모두 열악했고, 미국의 지원이 절실한 상황이었죠.
이때 베트남 전쟁이 터졌고, 미국은 **“자유진영의 연대”**를 강조하며 동맹국에 파병을 요청합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여기에 빠르게 응답합니다.
> “우리는 자유를 지키기 위해 싸운다.”
하지만 진짜 이유는?
→ 미국의 군사·경제 원조를 최대한 끌어오기 위한 전략적 파병이었습니다.
📌 2. 한국군의 구성 – 세 부대의 역할
한국군은 약 32만 명이 순차적으로 파병되었습니다.
베트남에서 활동한 부대는 다음과 같습니다:
맹호부대 (기계화보병): 중부 고원지대 퀴논 등지 주둔
백마부대 (보병): 나트랑, 푸옌 등 남부 지역 주둔
청룡부대 (해병): 다낭 인근 해안 및 중부 지역 담당
이들은 게릴라전에 특화된 전투훈련을 거쳐,
현지에서 작전 수행뿐 아니라 치안 유지, 도로 보수, 학교 건설 등의 민사작전도 함께 진행했습니다.

📌 3. 돈이 만든 참전 – “월남전 특수”
한국군 파병은 한국 경제에도 실질적 영향을 미쳤습니다.
파병 군인들의 송금은 외화 수입의 큰 부분을 차지했고
현지 군수 물자 납품으로 현대건설 등 기업들이 동남아에 진출할 기회를 얻었습니다.
대한민국 GNP의 10% 이상이 베트남 관련 수입으로 잡히기도 했죠.
그래서 당시엔 “월남 특수”, **“파병은 또 하나의 경제개발계획”**이라는 말도 나왔습니다.
📌 4. 그러나, 파병의 그림자도 있었다
긍정적인 면만 있었던 것은 아닙니다.
일부 작전 지역에서는 민간인 학살 논란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대표적인 사건으로는 퐁니·퐁넛 학살, 하미 마을 학살 등이 있으며,
현재도 베트남 일부 지역에서는 한국군에 대한 감정이 복잡합니다.
한국 내부에서도 병사들의 외상 후 스트레스(PTSD),
그리고 복무 중 발생한 전우 간 폭력, 상이군인 문제 등은
오랫동안 외면된 주제였습니다.
📌 5. 현재의 시선 – 사과와 화해의 길
2000년대 들어, 한국 사회 내부에서도
“우리는 무엇을 했는가”에 대한 재평가와 성찰이 이어지고 있습니다.
일부 시민단체는 베트남 민간인 희생자에게 사과와 배상을 주장하고 있으며
2023년 서울중앙지법은 한국 정부가 민간인 피해자에게 일부 책임이 있다고 판결하기도 했습니다.
> 과거를 직시하는 것이 미래의 평화를 만든다는 인식이 점차 확산되고 있습니다.
✅ 마무리: 우리는 왜 기억해야 하는가
베트남 전쟁은 한국의 성장에 일정 부분 기여했지만,
그 과정에서 전쟁이 남긴 상처도 분명 존재합니다.
“참전의 진짜 의미는 무엇이었는가?”
그 물음은 단지 과거에 대한 질문이 아니라,
오늘날 한국이 세계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으로 이어져야 합니다.
📌 다음 편 예고
7편에서는, 미국의 철군이 시작되는 계기였던 닉슨 독트린과 '베트남화' 정책,
그리고 1973년 파리 평화 협정이 베트남에 어떤 변화를 가져왔는지를 살펴보겠습니다.